Articles/Korean
한국 문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얼룩꼬마
2007. 6. 13. 03:29
누가 한국 문학을 죽이는가 <-파이미디어 기사 링크
이 기사에 담긴 인터뷰 내용과 기사에 달린 덧글의 내용이 '한국 문학'이 아니라 '한국 문학 시장'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최근 6년간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200권중 단 29권만이 한국 소설이다. 10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도 단 네 종뿐이니, 이것은 우리가 알고 느끼는 한국 문학 현실의 수치적 재확인이다. 누군가가 지적한다. 신인 작가 층이 얇다고.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알려진 신인 작가의 층이 얇을 수는 있지만 신인 작가 전체의 층 자체가 얇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알려질 환경도, 그들을 받아줄 시장도 없을 따름이다.
대형서점 관계자의 말은 더 가관이다. 인터뷰 내용을 가감없이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외 소설의 경우 소재가 신선하다, 일본 소설은 친근하기라도 하다. 그러나 한국 소설은 신변잡기적 소재가 많고 난해하다." 한국 소설이 난해한가. 사람이 누군가의 자녀이고, 누군가의 친구이며, 혹은 누군가의 연인이나 배우자, 부모, 스승, 제자 등 수 많은 자격을 갖고 있듯이 문학 또한 예술성, 흥미성, 학문성, 교육성, 사회성 등의 여러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해외 소설이라 표현된 구미권 소설의 소재적 특성에 따른 재미와 일본 소설의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은 이중 흥미성, 일본 소설의 경우는 흥미성과 더불어 탐미적 예술성만이 강조된 것이다. 이 중 기사에서 거론된 구미권 소설의 흥미 본위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고, 다만 일본 소설의 경우를 한국 소설들과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현재의 주류 일본 소설이 갖는 공감대의 특징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독자와의 감정적인 교감의 형성 이후로 어떠한 진전도 남기지 않는다. 문학에서 개인적 공감 외의 범위로 진전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성이다. 사회와 사회문제에 대한 시각, 비판의식이 비로소 독서의 감동을 자기만족 수준에서 사회를 통한 타자와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개인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대의 '팔리는' 일본 소설에는 이러한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를 신변잡기에 대한 수준에서 마무리 짓고 신변잡기 내에서 독자의 감정을 움직인다. 이러한 감정들은 흔히 애틋함 혹은 허무함이라 불린다.
반면에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숨결이 배어있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신변잡기라는 소재에서 출발했을 지라도 그 흐름을 구성하는 뼈대는 사람의 온갖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판의식으로 차있다. 만약에 한국의 문학이 사회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 문예만 추구하고 있었다면 오늘의 현실을 일컬어 홀로 남은 상아탑이 진정 말라죽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할 만하겠지만, 한국의 문학은 사회에 대한 호소를 담은 작품이며 결국 그 목적은 대중을 향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질타와 그로 인한 공감대와 재미를 유발하는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것, 그 반면에 진정으로 신변잡기 수준의 테두리 안에서 혼자만의 교감을 이끌어 내는 작품들이 호응을 얻는 것은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사회적인 문제를 직시하기 꺼리는 독자들이 개인의 위안에 안주하기 위한 독서만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당 기사에 몇몇 사람들이 덧붙였다. "너무 재미없어서 안 본다.", "수준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다시 되물어야 할 이야기다. "이해할 능력은 되는가? 어떠한 사회 문제에 대한 내용인지 생각하려 해보았는가? 혹은 사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은 있가?" 혹자는 "한국 소설은 날 가르치려는 느낌"이라서 싫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문제들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덧글처럼 "소위 수준 낮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 개인주의적인 독자를 위해서 학문으로서의 속성도, 사회성도 모두 포기한 채 흥미 본위로 변모하는 것은 알맹이 없는 호두를 키우는 것과도 같다. 현대 한국 문학과 독자 간의 괴리는 개인적 위안을 위한 독서에 머물러버리는 독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위 기사 내용 중에 문이당 임성규 대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작가와 출판사가 좋은 작품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독자 역시 진지하고 전통적인 글쓰기로 무장된 작품을 읽는 인내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나마 '남한산성'이 분발하고 있는 것은 애초에 책을 사는 사람이라고는 별로 없는 시장 속에서 그나마 글의 깊이를 찾는 이들이 얇은 지갑을 털어낸 결과일 것이다. 글읽기는 작가와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현대에도 변함없이, 문학은 누에고치를 감고 또 감아 겨우 한 줄기 실타래를 뽑듯 작가의 고뇌가 쌓여서 만들어진 생각의 산물이다. 그 목소리와 대화하기 어렵다면 대화할 수 있도록 역량을 길러보는 것이 어떨까. 삼베옷 입을만큼밖에 일하지 않으면서 비단옷이 비싸다고 투덜거릴텐가. 비싼 값을 치러야 한들 결국 비단옷을 입어서 좋은 것은 입는 사람 스스로가 아니던가.
*독자에게: 일본의 현대 소설과 관련되어 하고픈 여담입니다만, 소설가가 작품이 가질 수 있는 사회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고뇌에서 출발하고 소설가는 관찰하는 눈과 성찰하는 머리와 표현하는 손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다른 누구보다 사회의 여러 면면을 잘 보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회적인 사상을 대중에게 전할 때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대개 문학가, 소설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속성의 사람이 작품과 작자 자신의 사회성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시에 쏟아질 포화를 피하고 인기 작가로서의 자신의 영역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나아가 사회를 보는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반열에서 거론될 자격조차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회성의 문제는 작품의 문예적 예술성과 반드시 구별되어 생각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 기사에 담긴 인터뷰 내용과 기사에 달린 덧글의 내용이 '한국 문학'이 아니라 '한국 문학 시장'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최근 6년간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200권중 단 29권만이 한국 소설이다. 10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도 단 네 종뿐이니, 이것은 우리가 알고 느끼는 한국 문학 현실의 수치적 재확인이다. 누군가가 지적한다. 신인 작가 층이 얇다고.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알려진 신인 작가의 층이 얇을 수는 있지만 신인 작가 전체의 층 자체가 얇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알려질 환경도, 그들을 받아줄 시장도 없을 따름이다.
대형서점 관계자의 말은 더 가관이다. 인터뷰 내용을 가감없이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외 소설의 경우 소재가 신선하다, 일본 소설은 친근하기라도 하다. 그러나 한국 소설은 신변잡기적 소재가 많고 난해하다." 한국 소설이 난해한가. 사람이 누군가의 자녀이고, 누군가의 친구이며, 혹은 누군가의 연인이나 배우자, 부모, 스승, 제자 등 수 많은 자격을 갖고 있듯이 문학 또한 예술성, 흥미성, 학문성, 교육성, 사회성 등의 여러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해외 소설이라 표현된 구미권 소설의 소재적 특성에 따른 재미와 일본 소설의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은 이중 흥미성, 일본 소설의 경우는 흥미성과 더불어 탐미적 예술성만이 강조된 것이다. 이 중 기사에서 거론된 구미권 소설의 흥미 본위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고, 다만 일본 소설의 경우를 한국 소설들과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현재의 주류 일본 소설이 갖는 공감대의 특징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독자와의 감정적인 교감의 형성 이후로 어떠한 진전도 남기지 않는다. 문학에서 개인적 공감 외의 범위로 진전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성이다. 사회와 사회문제에 대한 시각, 비판의식이 비로소 독서의 감동을 자기만족 수준에서 사회를 통한 타자와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개인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대의 '팔리는' 일본 소설에는 이러한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를 신변잡기에 대한 수준에서 마무리 짓고 신변잡기 내에서 독자의 감정을 움직인다. 이러한 감정들은 흔히 애틋함 혹은 허무함이라 불린다.
반면에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숨결이 배어있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신변잡기라는 소재에서 출발했을 지라도 그 흐름을 구성하는 뼈대는 사람의 온갖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판의식으로 차있다. 만약에 한국의 문학이 사회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 문예만 추구하고 있었다면 오늘의 현실을 일컬어 홀로 남은 상아탑이 진정 말라죽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할 만하겠지만, 한국의 문학은 사회에 대한 호소를 담은 작품이며 결국 그 목적은 대중을 향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질타와 그로 인한 공감대와 재미를 유발하는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것, 그 반면에 진정으로 신변잡기 수준의 테두리 안에서 혼자만의 교감을 이끌어 내는 작품들이 호응을 얻는 것은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사회적인 문제를 직시하기 꺼리는 독자들이 개인의 위안에 안주하기 위한 독서만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당 기사에 몇몇 사람들이 덧붙였다. "너무 재미없어서 안 본다.", "수준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다시 되물어야 할 이야기다. "이해할 능력은 되는가? 어떠한 사회 문제에 대한 내용인지 생각하려 해보았는가? 혹은 사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은 있가?" 혹자는 "한국 소설은 날 가르치려는 느낌"이라서 싫다고 하였다. 이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문제들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덧글처럼 "소위 수준 낮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문학이 개인주의적인 독자를 위해서 학문으로서의 속성도, 사회성도 모두 포기한 채 흥미 본위로 변모하는 것은 알맹이 없는 호두를 키우는 것과도 같다. 현대 한국 문학과 독자 간의 괴리는 개인적 위안을 위한 독서에 머물러버리는 독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위 기사 내용 중에 문이당 임성규 대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작가와 출판사가 좋은 작품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독자 역시 진지하고 전통적인 글쓰기로 무장된 작품을 읽는 인내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나마 '남한산성'이 분발하고 있는 것은 애초에 책을 사는 사람이라고는 별로 없는 시장 속에서 그나마 글의 깊이를 찾는 이들이 얇은 지갑을 털어낸 결과일 것이다. 글읽기는 작가와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현대에도 변함없이, 문학은 누에고치를 감고 또 감아 겨우 한 줄기 실타래를 뽑듯 작가의 고뇌가 쌓여서 만들어진 생각의 산물이다. 그 목소리와 대화하기 어렵다면 대화할 수 있도록 역량을 길러보는 것이 어떨까. 삼베옷 입을만큼밖에 일하지 않으면서 비단옷이 비싸다고 투덜거릴텐가. 비싼 값을 치러야 한들 결국 비단옷을 입어서 좋은 것은 입는 사람 스스로가 아니던가.
*독자에게: 일본의 현대 소설과 관련되어 하고픈 여담입니다만, 소설가가 작품이 가질 수 있는 사회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고뇌에서 출발하고 소설가는 관찰하는 눈과 성찰하는 머리와 표현하는 손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다른 누구보다 사회의 여러 면면을 잘 보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회적인 사상을 대중에게 전할 때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대개 문학가, 소설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속성의 사람이 작품과 작자 자신의 사회성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시에 쏟아질 포화를 피하고 인기 작가로서의 자신의 영역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나아가 사회를 보는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반열에서 거론될 자격조차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회성의 문제는 작품의 문예적 예술성과 반드시 구별되어 생각되어야 할 일입니다.